그날도 저녁놀이 지는 시간까지 가짜 제자와 한창 고군분투하던 중, 문득 때늦은 사실이 머리를 치고 지나갔다. 이렇게 해선 평생 해도 끝이 안 난다는 것. “왜 멈춰요?” 바이올리니스트한테서 신경질과 의문 섞인 반응이 돌아와도 나는 조용히 악보를 정리했다. 그래, 아무리 브람스를 해도, 이다음엔 슈베르트와 드뷔시, 라벨을 해도, 그렇게 평생을 정희성에서 ...
어른 같은 아이의 사연은 요약하면 간단했다. 한 우주에 두 명 있기 어려운 무녀리들이 우연히도 같은 병원에서 만났고, 그걸 신기하게 보던 신적인 존재 하나가 ‘둘을 모두 살리는 것은 무리지만 하나를 치료제로 써서 다른 하나를 살리는 건 된다’며 꼬드겼고, 어리석은 정희성은 순진한 아이를 속여 저 대신 아이의 수명을 늘렸다. “제 잘못이에요. 제가 더할 나...
헨리는 완고한 데가 있어서, 내가 아무리 떠보거나 협박해도 자신이 지키기로 한 약속에 관해선 끝까지 입을 다물었다. H가 애를 어떻게 구워삶았길래 이런 싸가지 없는 놈이 이렇게 의리를 지키지? 궁금증이 조금씩 커졌다. 그래도 꼴에 자존심은 있다고, ‘기성 연주자 중에서 그만큼 정희성과 닮은 사람은 없다’는 내 말에 헨리는 토를 달지 않았다. 그가 그렇다면...
정희성의 장례식은 고국에서 비공개로 치러졌다. 조문객은 대부분 국내 클래식계에서 한 자락씩 하는 사람들이었다. 예중이나 예고 시절 정희성을 가르쳤던 사람, 함께 배웠던 사람, 자주 협연했던 지휘자. 개중에는 외국인도 딱 한 명 있었다. 왕립음악원에서 그를 가르쳤던 지도교수, 정희성에게 과르네리를 준 장본인이었다. 은회색 머리칼을 단정하게 넘긴 초로의 교수는...
* 주의 : 등장인물의 자해, 자살 시도 묘사가 있습니다. 잔인하거나 유해하지 않도록 주의하였으나, 널리 양해해주시길 바랍니다 내 애원이 먹혀들어간 날부터 정희성과 나는 아무 말 없이 동거를 시작했다. 낮시간에 정희성이 어딘가로 외출해서 사람들을 만나는 동안 나는 장을 봐 와서 저녁거리를 해 놓고, 집안 구석구석 청소하며 필요 없는 물건들을 분류했다. 어차...
* 연주장면 1. 라흐마니노프 전주곡 1번, 작품번호 3-2, 올림 다 단조 2.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소나타 2번, 내림 나 단조 3. 쇼팽 피아노 소나타 2번, 내림 나 단조 정희성의 마지막 공연에서도 나는 인터미션이 끝나고서야 무언가 이상함을 감지했다. 그는 단언한 대로 전날과 질적으로 다른 음색을 보여줬다. 아직도 하루 사이에 성장할 만큼 어린 나이였...
* 연주장면 1. 시벨리우스 바이올린 협주곡, 라 단조 2. 이자이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 3번, 라 단조 그 개자식. 그놈이 한국을 영영 떠난 다음에도 나는 정신없이 바빴다. 음악하느라 바쁜 게 어디 그놈뿐인가? 나도 정희성처럼 월드클래스는 아니어도 입시 치른다고 개같이 고생했다. …뭐 물론, 고3 주제에 첫 한 달 간은 제대로 정신 못 차린 건 인정...
* 주의: 선정적/폭력적인 내용에 대한 암시가 있습니다. * 연주장면 1. 바흐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 2번, 가 단조 음악원 생활은 만족스러웠다. 세계적으로 재능 있는 음악가들이 모여드는 곳이니만큼 배울 게 많았다. 단순한 손가락 기술이 아니라 제대로 된 음악적 고민을 깊이 해 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었다. 학업을 제하더라도 지낼 만한 환경이었다. 런던의 ...
* 트리거워닝: 가정폭력 내 반주자는 이상한 애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랬다. 당장 내년이면 고3, 입시와 콩쿠르로 정신없을 시기에 걘 참 쉽게도 굴었다. 겨우 피아노 협주곡 레퍼토리 몇 번 맞춰줬다고 매번 소나타며 협주곡 반주를 도맡아주질 않나, 지치지도 않은지 어쭙잖은 피아노 레슨으로 사람을 웃게 하고, 시시때때로 ‘도련님은 이런 거 모르지’하는 말과...
아침이라기엔 너무 이른 새벽이었다. 웅웅, 휴대폰 진동에 잠이 깨서 켜보니 토요일 새벽 4시였다. 그날 밤에 아빠를 부둥켜안고 달래느라 진땀 빼고, 새벽에 몰래 빠져나와 서재의 숨겨진 책장이 없어진 걸 확인한 뒤 다시 잠든 지 겨우 두 시간째였다. 피로한 머리가 제대로 굴러가지 않았다. 그런데 문자 발신인을 보는 순간 내가 눈 뜬 이유를 깨달았다. [정희...
* 2차지만 1차같은 2차로 모르셔도 내용이해엔 지장 없습니다 / 예고 음악물 청게 * 연주장면 1.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23번, 바 단조 2. 바흐 골든베르그 변주곡 척추부터 시작된 온 힘을 손끝에 내리꽂는 화음. 열정 3악장이 포문을 열자마자 강렬한 화성은 왼손에 집요한 리듬을, 오른손에 변화무쌍한 멜로디를 일으켰다. 정민의 스케일은 가히 열정이라 불...
* 연주장면 1.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9번, 가 장조 “이게 뭐야?” 정희성이 곰돌이 키링을 달랑, 들었다. 늘 만나던 4층 연습실 한구석엔 이제 정희성이 없으면 어색할 지경이었다. 가느다란 손에 대롱대롱 매달린 곰돌이는 등 뒤에 지퍼가 달려 있었다. 나는 보면대에 악보를 정리해두면서 말했다. “그거 뒤에 지퍼 괜히 열어보지 마라.” “왜?” “...
리버시블이지만 여기서는 문대른 글만 발행합니다! 문대왼 포스트도 좋아요 누를 수 있어요 그치만 표기하신대로 봅니다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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